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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425년 전 이순신 장군 얼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이충무공 영정 발굴한 임채우 교수
이충무공 생전 모습 400년만에 세상에 등장하다
충무공의 생전 모습을 담은 통영 착량묘(鑿梁廟) 봉안 추정 충무공 영정 발굴
발굴 순간 혼(魂)이 나가는 느낌…당시 흥분된 심정 전해
전형적인 조선시대 무인상(武人像)에 높은 수준의 화격(畵格)으로 표현한 걸작 발견
임채우 교수, “충무공의 얼이 서린 순천지역에 전시희망…국가에 기여하는 학자의 길 걸을 터”
2023. 09.21(목) 10:47확대축소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수군(水軍)을 파하고, 육전(陸戰)에 힘쓰라”는 선조 임금이 내린 교서에 이순신(1545~1598)이 장계로 답한 내용이다. 이후,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적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문무에 능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맞서,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남긴 세계적인 명장이다.
사후, 그를 수호군신으로 섬기는 민중들의 추모 열정은 각지에 추모사, 영당 건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산 현충사, 통영의 충렬사, 순천의 충무사, 여수의 충민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 20곳 넘는 사당들은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추모와 함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온 국민의 염원을 담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을 “세계역사에 최고의 해군제독!”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에 깊이 심취·연구 중인 사람이 있어 찾았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담긴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임채우 교수(한국윷문화연구소장)가 그 주인공이다.
임채우 교수
임교수가 특히 관심이 많은 분야는 이충무공의 영정(影幀)이다.
그가 최근 발굴·입수한 조선후기 통영 착량묘(鑿梁廟) 봉안 추정의 이충무공 영정은 발굴 순간 그야말로 “혼(魂)이 나갈 정도로 흥분됐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이를 감정한 고미술 전문가들로부터 전형적인 조선시대 무인상(武人像)에 높은 수준의 화격(畵格)으로 담아냈다는 평가와 찬사가 나왔다.
사실, 이충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400년 이상 그의 실제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난중일기’와 ‘징비록’ 등에서 공적과 용모를 적은 기록은 엿볼 수 있지만, 얼굴과 자태를 그린 진본의 초상화 영정은 현재까지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충무공 새 표준영정 제작을 놓고 여러 설(說)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임교수의 충무공 영정 발굴을 보도한 한겨레신문(8월 28일자 노형석기자)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도 왕실과 조정에서 정식으로 충무공 공신도나 영정을 그린 기록은 없단다. 해전 중 황망히 전사한 탓에 화공이 지켜보고 그릴 기회는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하고, 사후에도 선조임금이 충무공을 경계하며 좋게 보지 않았던 탓이란 설도 제기된다.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조선시대 작품으로 ‘충무공이순신상’이라고 명기된 무인풍 초상화가 있지만, 정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 양털로 모자와 군복을 만들었고 얼굴도 북방 유목민 용모를 하고 있어 조선 장수의 상이라고 하기 어렵고 우리 한국인의 얼굴과도 거리가 있다는 평가이다.
덧붙여, 이충무공의 영정은 민족의식이 싹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상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순신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이 그린 관복 입은 영정(아산 현충사 소장)이다. 1973년 국가표준영정으로 채택된 뒤 100원 주화와 500원권 등에 쓰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충무공 영정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심전 안중식의 ‘한산 충무’(1918)다. 근대기 이후 세간에 처음 유명세는 1933년에 그린 청전 이상범의 영정으로 월전의 작품과 달리 기세 당당한 수염 달린 무인상의 자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표준영정에 채택되지 않으면서 현재는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뒤 일제강점기 화단 실력자였던 이당 김은호가 1952년 영정을 그렸고,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1953년 장우성이 그린 영정(아산 현충사 소장)이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뒤에는 정형모 화가가 1978년 그린 영정이 나왔다. 그 외에 여수 영당에 봉안됐던 영정의 사진본과 일제강점기 신문 삽화 등이 전한다고 했다.

표준영정 철회청원이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교수가 최근 연구·발굴한 ‘충무공영정’은 조선시대 충무공의 생전의 모습과 갑옷양식을 사실 그대로 담고 있어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정은 원래 1599년 충무공 휘하의 장병과 통영의 어민들이 충무공을 기려 자발적으로 만든 착량묘라는 작은 사당(착량영당이라고도 불림)에 봉안됐던 영정을 이모(移模)한 것으로, 조선 정조 때 전국의 충무공 자료를 조사 교감해서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에도 실린 조선시대 충무공 영정 유일본으로 평가된다.
영정을 살펴보면 ‘통영충무공영당봉안(統營忠武公影堂奉安)’이란 화제(畵題)에 치켜 올라간 매서운 눈매에 화살을 메고, 오른 주먹을 움켜쥐고 왼손엔 칼을 쥔 당당한 모습이다. 임 교수는 “그동안 소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영정으로 충무공의 용모나 갑옷 양식 등에 새로운 연구를 촉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본지의 기자와 만난 임채우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충무공 영정은 바로 신성포 영당(지금의 순천 충무사)과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순천의 지방지 중에서 최후로 작성된 <승평속지,1826년>를 보면 순천 왜교 신성리 영당에 이순신장군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구한말 관료 김윤식이 1860년 4월 순천에 갔을 때, “용두포로 나가 충무공 초상화를 배알했다<망해대기, 望海臺記>”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또 일본인 요시다 이에자부로(吉田英三郎)의 <조선지,1911년>와 일본인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조선명승시선,1915년>에도 언급된다고 덧붙였다.
임교수는 “신성포 영당에 본래 모셔져 있던 영정이 바로 이번에 발견된 충무공 영정이거나, 똑같이 이모(移模)한 영정이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이당 김은호’가 그린 갑주본(甲胄本) 영정을 예로 들었다. 새로 발견된 충무공 영정은 이당 김은호 영정과 매우 유사하다. 왼손으로 칼을 들고 오른손 주먹을 쥔 모습이나, 갑옷과 투구 등 세부묘사 등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새로 발견된 영정은 지금으로부터 2백 년 전에 이모(移模)한 작품으로, 70년 전에 그린 이당 영정이 이를 모방했을 수밖에 없다.
이당 김은호의 자서전 『서화백년』을 보면, 그 내력이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당이 순천의 유림들에게서 충무공 영정 제작을 의뢰받자 전국적으로 충무공 영정을 모두 조사했고, 또 당대의 명사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았다. 그때, 당시 국학대학 총장이었던 이중화씨가 ‘벌교본’ 영정사진을 주었는데, 이 벌교본 영정이 가장 충무공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평가를 받았고 이를 저본(底本)으로 삼아 모방해서 그렸다는 내용이 있다. 다만,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이충무공의 모습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과 같았다는 언급이 있는데, 얼굴만 선비의 모습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벌교본 영정을 모방해서 그렸다고 했다.
순천 충무사 전경

여기서 ‘벌교본’은, 신성포 영당을 가리킨다고 한다. 신성포 영당 지금의 충무사는 현 행정구역상 벌교가 아니라 순천에 속해있어서, 현재의 벌교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해 충무공과 호남지역의 관계를 연구한 노기욱 전남대교수는 벌교본은 순천 충무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신성포에는 뻘이 발달해있어서 ‘벌포’ 혹은 ‘개포’라고도 불렀고, 순천 왜교(倭橋)는 신성포 뻘 위에 다리를 놓았다는 의미로 ‘뻘다리’ 혹은 벌교(筏橋)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신성포 옆의 왜교를 ‘뻘다리’ 혹은 ‘벌교’라고 부른 데에서, 이중화 총장이 신성포 영당을 벌교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은 신성포 영당에는 이번 발견된 영정의 모습이 3차례에 걸쳐 계속 봉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임교수는 신성포 영당이 있는 광양만 일대는 왜란 당시 순천왜성(신성포 영당과 지척에 위치)에서 엄청난 왜적들이 죽은 곳이다. 순천 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597년(선조 30) 9월 축조하기 시작하여 3개월 만인 1597년 12월에 완공한 일본군의 요새로 온갖 노략질을 저지르다가, 노량해전에서 수천 명의 왜적이 전사했다.
이후 왜적들의 원혼으로 인해 이곳 주민들과 어민들의 생활이 불안해졌는데, 1608년 이곳을 지나가던 한 도승(道僧)이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을 지으면 안정될 것”이라고 예언한 데에서 영당 탄생이 유래됐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왜란이 끝나고 10년 후, 당시 유일하게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있던 통영의 착량묘(鑿梁廟)에서 영정을 모사(模寫)해 이곳 신성포 영당에 모시고 장군이 돌아가신 날 전날인 11월 18일을 기해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낸 후로는 왜성의 밤도깨비 소동이 없어져 마을이 안정되어 어민들도 풍어(豊漁)를 이뤘다는 것.
통영 착량묘 영정은 이충무공께서 순국하신 직후에 그 휘하의 장병들이 어민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그려 모신 영정으로 이충무공의 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영정이었는데, 1878년 이규석 통제사가 충무공영정을 이안(移安)해 나갔다가 안타깝게 행방불명이 됨으로써 순천 신성포 영당에만 유일하게 충무공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다.
더욱 애통한 것은 신성포 영당의 영정이 일제강점기 때에 불타서 없어졌고, 해방후 순천 충무사로 재건하면서 순천 유지들의 정성으로 이당 김은호의 갑주본(甲胄本) 영정이 모셔지게 되었다.
임교수는 “이당 김은호의 영정은 바로 조선시대 신성포 영당에 모셔졌던 ‘벌교본’이란 그 사진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원래 조선시대에 모셔졌던 모습이 우연히 재현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착량묘에서 행방불명된 충무공 영정이 200년 만에 환생 되었다”고 표현했다. 그 뒤에 이당의 영정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1970년대 순천에서 활동하던 장요섭 서남수 화백이 이당 영정을 보고 다시 모사한 영정으로 교체되었다. 이렇게 해서 4백년간 3차례에 걸쳐서 같은 모습의 영정이 우연히 계속 충무사에 봉안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번에 임교수가 발견한 영정이 바로 그 원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발굴연구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임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이충무공 영정은 원래 “순천 신성포 영당에 모셔졌던 영정이니, 충무공의 얼이 서린 순천이나 여수 지역에 전시되면 더욱 의미가 클 것이라며, 관련 기관에서전시를 요청하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순천 신성포 왜성. 저 멀리 왜군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천수기단’이 보인다.


박양수 기자 cws2344@hanmail.net        박양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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