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추가
Update 6.24(금) 11:57
종합 정치/자치 사회/환경 농업/경제 교육/문화 기획/특집 전체기사
업데이트 뉴스

<선비정신>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왕건이 궁예의 수군장군이 되어 나주 빨래터에서 오씨를 만나고
태조의 제 2위의 부인이자 태자 모후로 당당한 위상을 떨치나
혜종 재위는 불과 2년, 어머니 장화왕후 세월도 그것으로 막 내려
2022. 03.30(수) 10:21확대축소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과 족보.
때는 신라 효광왕 7년(903) 3월. 예성강구를 출발한 일단의 함대가 서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영산강구(목포)에 닻을 내렸다. 함대의 대장은 후고구려 궁예의 부장인 아찬 왕건. 그의 공략 목표는 금성. 금성은 영산강 중·하류의 광활한 곡창지대의 중심이자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강구에서 상륙하여 전열을 정비한 왕건군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단과 호응하면서 수륙 양면 작전으로 금성을 점령하였다. 금성만이 아니라 인접한 10여 군현까지 병합하여 금성을 폐하고 나주(羅州)를 설치하였다. 왕건의 나주 경영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궁예가 왕을 지칭한지 8년 만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지 11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에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금성 공략에 성공을 거두고 일단 개선하였다. 이후로 그는 더욱 궁예의 신임을 받게되고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 번의 출전으로 서남해상의 바람이 지거나 교두보 나주가 안정될 수 없었다. 나주는 해상과 육지에서 끊임없이 후백제의 집요한 도전을 받았다.
왕건은 1차 나주 진출 이후, 효공왕 13년(909)부터 왕위에 오른 918년 직전까지 1~2년 간격으로 5차례나 나주 방면에 진출했다. 그는 이 기간에 견훤의 후백제와 여러차례 치열한 해전을 치른 끝에 서남해상의 패권을 잡았다. 내륙에서도 싸움을 계속하면서 지배지역을 확대하고 고착해 나갔다. 그 결과 왕건의 ‘나주’는 지금의 나주시 지경에 그치지 않고 영암, 강진, 해남, 함평, 무안, 영광까지를 아우르고, 거기에다 서남해상을 합친 퍽 광대한 영역이었다.
이 나주 경영으로 왕건은 후백제의 후방에 견고하고 풍요로운 기지를 구축함으로써 그 뒤통수를 움켜쥐고 발목을 잡아 견훤의 북진, 동진의 예기를 둔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나주 진출은 절묘한 전략에서 나온 원대한 포석으로, 이후 삼국의 판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제1차 진공이후 나주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궁예 생존시에 나주는 이미 왕건의 소왕국이 되어 있었다.
나주는 왕건에게 전략적인 기지일 뿐 아니라, 궁예의 광적인 피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어주었고, 첫 왕자(2대 혜종)를 낳은 장화왕후와 부부의 연을 맺어준 곳이다. 또 있다. 왕건의 아버지에게 송악 남쪽 기슭에 집터를 잡아주고, 삼한 통일의 영주 출생을 예언했다는 도선국사의 출생지가 나주와 지척인 영암(나주와 딸린 군)이다. 때문인지 고려는 모두 34대의 왕에, <고려사 열전>에 오른 후비 총수는 125인이다. 이중 전라도 출신은 모두 5인이다. 5인 중 4인은 고려 초에 집중되어 있고 1인은 고려 중기에 해당하니, 중엽 이후에는 단 1명도 후비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느 왕조에서나 왕실의 외척과 정치권력은 직결되었으니, 왕후를 배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도 된다. 고려 왕실의 후비는 아니지만, 고려말엽 광주 출신의 화평군 김심의 딸 달마실리가 일찍이 원에 들어가, 원 인종의 편비가 되었다가 태정제 때에 황후로 추봉된 일이 있었음을 먼저 부기한다. 허나 전라도의 규수로 맨 먼저 왕후에 오른 사람이 태조비 장후왕후 오씨다. 조부는 오부돈이고 아버지는 다련군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사간연위의 딸로 이름이 덕교였다. 다련군의 본명인지, 아니면 이름이 다련인데 왕후의 아버지라 하여 ‘군’을 붙여 부른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이 가문이 지방의 호족쯤이라도 되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힘도 없는 영세한 가문이었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오씨가 태조를 시침한 첫날 밤에 태조가 오씨를 측미한 출신이라 하여, 혹 있을지도 모를 수태를 막으려는 방법을 강구했다는 기록과 후일 오씨 소생을 태자로 책립할 때도, ‘측미한 가문의 외손이기에 주저했다’고 기술한 것을 보면, 오씨가 호족대열에 끼는 가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려사 열전> ‘장화왕후 오씨’에 태조와 왕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퍽 소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어느날 왕후의 꿈에 포구에서 용이 나와 뱃속으로 들어오므로 놀라 꿈을 깼다.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부모도 기이하게 여겼다.
그로부터 얼마지난 뒤 태조가 궁예의 수군장군이 되어 나주를 진수하게 되었는데, 함대를 목포에 정박시키고 멀리 냇물 위쪽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지 않은가. 이를 이상이 여겨 가보니 처녀 하나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데리고 가서 시침케 했으나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짐짓 자리에 배설하였다. 그러자 오씨가 그것을 빨아들여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처녀가 후일의 장화왕후고 아들은 뒤의 혜종이다. 혜종의 얼굴에 자리 무늬가 역역히 나타나므로, 세상에서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 불렀다. 혜종은 항상 잠자리에 물을 부어두는가 하면, 또 큰 병에 물을 담아놓고 팔을 씻으며 즐겼으니, 참으로 용의 아들이라 할 만하였다.
이 시기는 이야기 단서로 보아 태조의 제 1차 나주공략 때(903)의 일로 짐작되는데, 혜종이 912년에 출생한 사실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로맨스는 태조의 2차 진수(909~910)때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이 한토막의 이야기가 흥미는 있지만 후세에 꾸며 만들어진 이야기 같아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다. 아마 시냇가에서 본 오씨의 자태는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30대 전반의 혈기왕성한 무장이 첫눈에 반한 여인을 끌어들여 동침하면서 한미한 출신의 여인으로서 잉태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계산을 했다니 너무 삭막한 서술이다. 또 상대방은 처녀인데, 오기와 몽니를 부리듯 자리에 쏟아놓은 배설물을 흡입하여 임신하였다니, 처음부터 오씨로서는 턱걸이 동침에 심한 수모를 겪은 셈이었다. 다만 아무도 모를 두 사람만의 천고의 비밀이 조선시대 근엄한 학자들에 의해 문자화된 사실과, ‘측미한 출신’이라는 말의 함축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들에서 장차 두 모자가 맞이할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오씨는 태조의 첫째 부인 유씨 다음의 제 2부인이 되어, 총 29인의 부인 중 정식 왕후에 책봉된 6명 중 제 2위이자 태자의 모후로 당당한 위상을 부렸다. 오씨의 아들 무(武)는 어려서부터 퍽 총명하고 도량이 넓고 지용이 뛰어났었다. 첫째 왕후 유씨에게는 소생이 없었으므로, 무가 태조의 맏아들이었다. 당연히 태자책봉을 받을 처지였지만, 태조는 그것을 망설였다. 건국 초기라 아직 왕권은 확립되지 않고 왕위계승 원칙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건국공신이나 지방의 호족을 배경으로 가진 왕자들이 있으니, 태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혈연상의 후견세력 대안으로, 장군 출신의 대광 박술희를 보호자로 정하고 고명하여 무를 태자로 책봉하였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태조 4년(921)의 일로, 그때 태자의 나이 10세였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혜종의 재위는 불과 2년, 잠깐만에 막을 내렸다. 너무나 어이없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니 그의 어머니 장화왕후의 세월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나주의 바닷가 벽촌에서 운명적으로 적대국의 장수 눈에 띄어 동침한 인연으로 천신만고 끝에 왕후가 되고, 아들의 등극으로 태후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미처 태후로서의 영화를 누리기도 전에 아들 왕을 앞세우고, 그 뒤로는 세상의 관심권 밖에서 혈혈단신으로 얼마나 서러운 세월을 보냈는지, 그 행적이 묘연하다. 혜종 이후 장화왕후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단 한자의 기록도 찾을 수 없거니와 능마저 전하지 않는다. 왕후, 왕태후로서 너무 적료하지 않는가. 이런 저간의 사정을 헤아려 볼 때, 어쩌면 왕후는 나주 친가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장화왕후는 비록 단편적이지만 고려시대의 ‘전라도 위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사회/환경 주요기사
나주시, 영산대교 버스 운행 재개 … 7월 1…나주 남평읍, 청정전남 으뜸마을 2년차 사업…나주시, 200년 된 토종 배나무 등 5건 향토…
나주시, 남평강변도시 공원 바닥분수 이달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추세요! 화순군, 수목 물주기 확대…가뭄 대책 마련
전남도, 유기농 생태마을 4곳 신규 육성 뉴욕나주향우회, 나주시에 인재육성기금 30…나주 세지면 ㈜창억, 어버이날 위문품 기탁
나주시, 가정의 달 맞아 ‘아동학대예방’ …전남도, 글로벌 웰니스 관광지 본격 육성 한전KDN, 탄소중립 실천 앞장
나주 금남동, 금성산 벚꽃길 손님맞이 분주전남도, 숲치유 산업 중심지 잰걸음 남구, ‘마을공동체 회계 실무지원단’ 모집…
최신 포토뉴스

윤병태 나주시장직 인수…

‘역사와 문화를 품은 나…

나주시의회, 제9대 의회…

윤병태 시장 당선인, ‘…

나주 남평읍, 청정전남 …

가장 많이 본 기사
회사소개 | 회원약관 | 개인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윤리강령 | 공지사항 | 제휴/광고문의 | 기자전용게시판

Copyright ⓒ bitgaramnews.com 인터넷신문 등록 : 광주 아 00237 | 등록일 : 2016.11.18 | 발행. 편집인 : 최왕식 | 부사장 : 김재옥 l 편집국장 : 박은정

(61647) 광주광역시 남구 독립로 40 기사 제보 및 문의 : (062) 676-6687(代) 문의메일 : cws2344@hanmail.net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미경

(58325) 전남 나주시 중야2길 29 미래빌딩 2층 기사 제보 및 문의 : (061)337-4005

본사이트의 게재된 모든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 의 사전 허가없이는 기사와 사진의 무단 전재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