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선비 염동일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집을 떠나 일을 한 뒤
마련한 돈을 평양 기생에게 모두 탕진했으나
기생이 애정 증표로 준 가마솥으로 큰 부자 돼
| 2022. 03.30(수) 10: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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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루는 아내가 남편 앞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집이 이렇게 가난한데 선비집이면 뭐합니까. 무슨 방도를 찾아보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평소 말이 없던 아내가 이렇게 말하니 염 선비는 한동안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신 볼 낯이 없구려. 그런데 여보! 우리 부부가 10년만 떨어져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집안일을 잊게 해 준다면 내 좋은 수를 강구해 볼 수 있지만 당신과 자식들 생각에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다오” 이에 아내는 남편 앞으로 다가 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가정이 넉넉해 질 수만 있다면 10년 정도 이별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걱정 마시고 결행해 보소서” 그러자 염 선비는 이튿날 바로 처자와 이별하고 집을 나섰다.
서울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또 지방에 내려가 여러 지역의 사정을 살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개성이 장사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으니 한 번 가봐야겠다’ 타향이니 편한 마음으로 염 신비는 장사에 뜻을 두고 개성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피던 끝에 어느 커다란 상점으로 들어가서 주인과 인사를 나눈 뒤 일을 거들면서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고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주인 박씨는 그러라고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염 선비는 염씨가 되어 상점의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서 장사하는 비법을 배웠다. 이에 주인이 염씨를 관찰한 결과 천성이 성실하고 글공부를 하여 문장에도 능통하니 그게 신임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주인 박씨는 상점의 모든 일을 염씨에게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물자를 취급하는 상인들 단속에 전념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입이 몇 배로 오르는 것이었다.
주인은 염씨를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왜 내가 진작 자네를 만나지 못했는지 모르겠네” 그리고는 염씨를 더욱 신임하고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이러는 동안 몇 년의 세월이 흐르니, 하루는 주인 박씨가 술상을 차려놓고 술을 권하면 말했다. “여보게 염씨 자네 때문에 우리 상점이 큰 부자가 되었네. 그리고 자네도 이제 내게서 장사하는 방법은 다 배운 것 같으니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살펴 그 방법을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먼, 내 지금 돈 1천 냥을 줄 테니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자네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면서 내게 배운 것을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게나” 그러자 염씨는 사양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대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배운 것을 한 번 시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길을 간다면 어찌 즐거움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그 돈을 받아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천 냥의 돈을 가지고 상점을 나선 염씨는 곧장 평양으로 가서 한 집에 주거를 정했다. 이튿날 주인에게 물었다. “이곳 평양은 우리나라의 서경(西京)으로 강산이 아름답고 풍경이 뛰어나 곳곳에 신령한 기운이 서려있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름난 기생도 있을 테니 일러 주십시오” “아, 명기라면 곧 평양이지요. 여기 춘색(春色)이란 기생이 있는데 우리 평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지요”
염씨는 주인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기생 춘색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기생과 밤낮으로 붙어 놀면서 돈을 물 쓰듯 써대니, 춘색을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염씨를 받들어 섬겼다. 돈 천 냥이란 벌려고 하면 매우 힘이 들지만, 쓰자고 작정하면 특히 기생집에서라면 바닥이 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새 천 냥의 돈을 모두 탕진한 염씨는 기생과 작별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 주인 박씨를 만나서 말했다. “내 색향(色鄕)이란 평양에 가서 남아의 호탕한 마음을 풀고자 기생 하나를 만나 노는 동안 어느새 천 냥의 돈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으니, 실로 주인에게 부끄러울 따름이외다” 이에 주인 박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아, 그런 것이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인데 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는가? 내 지금 또 천 냥을 주겠으니 가지고 가서 다시 시험해 보도록 하게” 라고 하면서 디시 천 냥을 내주고 속히 떠나라는 것이었다.
돈을 받은 염씨는 상점을 나서자마자 또 다시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춘색의 집을 찾아가니 그녀는 반가워하면서 많은 돈을 보고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염씨는 이제 춘색과 정이 들어 밤낮으로 껴안고 전보다 더 진한 향락을 누리니 돈이 바닥나는 속도는 지난날보다 더 빨랐다. 이에 염씨는 다시 돈이 떨어지자 춘색의 집을 나서니 그녀는 돈이 없어도 좋다며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붙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씨는 그럴 수 없다고 뿌리치고는 개성으로 돌아왔다. 상점 주인을 만난 염씨는 돈을 다시 기생집에서 모두 탕진했다고 밝히면서 이제부터는 열심히 상점 일을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매사는 삼세번이란 속담도 있지 않는가? 포기하지 말도 다시 시도해야 하게” 이러면서 다시 돈 천 냥을 내 주는 것이었다. 염씨는 돈을 받아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장 평양으로 가서 기생 춘색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지난날처럼 춘색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돈을 쓰니, 얼마 후 또 천 냥은 바닥이 나버렸다. 그러자 염씨는 하루도 더 있지 않고 작별을 하니, 기생은 염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거금 3천 냥을 모두 내게 주셨으니 아무리 대장부의 마음이라도 회한이 남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좋아서 즐겼는데 무슨 회한이 남는단 말이오” “그래도 그렇지요.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이 3천 냥은 고사하고 천 냥에 해당하는 물건도 없습니다만 그저 어떤 것이든 제 애정의 증표라 생각하시고 한 가지를 가져가시지요” “그것 참 고마운 말이오. 그렇게 호의를 베푸니 내 어찌 거절하겠소. 그럼 저기 있는 저 가마솥이나 내게 주시오” 염씨가 다른 값진 물건이 아닌 낡은 가마솥을 가져가겠다는 말에 기생은 배를 두드리며 한참동안 웃었다. “낭군님께서는 물건을 고르시는 취향도 진실로 기이합니다. 우리 집에 값진 물건들도 많은데 그런 것은 다 놔두고 못쓰게 된 가마솥을 고르시다니 진정 개성사람들이 박물(博物)을 좋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 그것을 원하신다면 가져가도록 하십시오” 곧 염씨는 가마솥을 말에 싣고 기생집을 떠났다. 개성으로 돌아와 상점 주인을 만나니 박씨는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진정 무슨 물건을 사 가지고 왔는가” “예전과 다름없이 돈을 허비했으니 어찌 좋은 물건을 사가지고 왔다고 하겠습니까? 그저 이것밖에 가져 온 것이 없답니다” 그리고 염씨는 주인 박씨에게 미안해하면서 가마솥을 내려놓았다. 이에 박씨가 그 가마솥을 살펴보더니 크게 놀라면서 칭찬했다. “오, 기이한 사람이로다. 이제야 자네의 박물에 대한 식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겠네. 이것은 왜국의 ‘오금부(검은색 금으로 된 가마)’라는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가 가지고 왔다가 평양에서 분실했다고 들었네. 내 어릴 적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보려 애를 썼지만 허사였네. 정말 신기한 일이구면”
주인 박씨는 곧바로 왜관에게 알리나, 왜인들이 이 가마솥을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값을 따지지 않고 수만 냥의 돈을 주는 것이었다. 상점 주인은 그 돈의 절반을 주면서 치하했다. 이에 염씨는 사양하면서 “본래 주인의 돈을 가져가서 모두 탕진했으니 이 돈은 모두 주인의 돈입니다. 그동안의 배려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니, 주인 박씨는 억지로 그 돈을 말에 실어 보내 주는 것이었다. 염씨는 옛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집을 나간 지 7년 만에 돌아온 염씨는 이 돈으로 가업을 일으켜 큰 부자가 되었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