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기사> 문중의 명예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효자 열녀는 문벌을 빛내는 밑천이고
문벌이 넘쳐나니 저 개는 샌님댁 도련님이오?
| 2020. 08.28(금) 1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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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법이란 종중 특유의 규범이다. 종가를 중시한다든가, 시제 등 종중 행사에 참여한다든가, 장유존비의 질서를 지킨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가례란 제사의식 등 관혼상제를 절도있게 거행하는 것이다. 가묘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이 모든 것이 종손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아울러 학식과 덕망 또는 항렬이 높은 문장(門長)에 의해 문중의 질서가 유지된다. 문중에는 위토(位土)라는 일정한 재산이 있다. 이 재산은 문중 공동소유이고 그 수익은 시제 등의 경비는 물론 효자, 열녀의 비석과 충신각 등을 짓는 재원이 된다.문민정부와 민주화 이전의 우리나라 가족제도는 장자 중심이었다. 재산은 대부분 장자가 상속했으며, 이 장자손의 집을 종가라 한다. 종가는 종중에 관련된 일을 주관하면서 몇가지 특권을 누린다. 첫째는 경제적 우위이다. 재산 상속을 받았는데도 가산이 줄어들면 종중에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만들어 종가에 준다. 둘째는 종중재산의 관리권이다. 물론 종손이라고 하여 종중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처분권을 쥐고 있다. 문장은 문중에서 항렬이 높은 유력한 인사가 맡는다. 문장은 문중의 질서를 위해 형벌도 서슴없이 가하는 종법 시행권을 가지고 있다. 문벌은 지체 낮은 다른 씨족과는 결코 혼인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한 동리에 살거나 친분이 있는 집안 사이일지라도 자기 씨족보다 지체가 낮으면 혼인을 맺지 않는다. 반면에 지체가 낮은 씨족은 지체 높은 가문과 혼인을 맺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일단 한번 턱걸이 혼인을 트면 씨족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 혼인을 할 계기를 잡게 되기 때문이다. 문벌가에서는 문중에 청상과부가 생기면 재가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수절을 강요한다. 그 과부에게 양자를 들어주고 공동으로 생계를 도와주면서 감시한다. 지아비를 따라 자살을 하거나 끝까지 수절하면 통문을 돌려 열녀로 기리고 정절사 따위를 짓는다. 문중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되는 것도 문벌을 빛내는 한 통로였다.
효자, 열녀를 기리는 이유는 풍속을 순화한다는 유교적 명분에 따른 것이다. 조정에서는 효자, 열녀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면서까지 이를 표창하였다. 이 방법이야말로 아무 재능이 없어도 문벌을 선양하고 영달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므로 종종 과장과 조작이 이루어졌다. 가령, 한 문중의 어느 사람에게 조그마한 효행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온 집안이 나서서 산신이나 용왕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호랑이를 시켜 멧돼지를 담 너머로 던져 주었다든가, 꿩이 방안으로 날아들었다든가 하는 얘기를 퍼뜨린다.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손가락의 피를 흘려넣거나 허벅지의 살을 베어서 삶아 먹이면 살아난다는 속설에 의해 실제로 이런 일이 저질러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다. 경상도 지방 곽씨 집안에서 일어났다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느 대가의 사랑채에 들러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날 밤 박문수는 그집 안채의 이상한 분위기에 말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정을 살폈다. 발소리를 죽여 안채로 다가가니 담을 넘어 들어온 중과 그 집안의 과부가 온갖 희롱을 벌이고 있는게 아닌가. 박문수는 의분을 못이겨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그집 총각이 아침에 중의 시체를 감쪽같이 치우고 형수가 자결하였다고 온 동네에 기별하며 슬피 울었다. 그 총각은 사실대로 세상에 소문이 나면 가문의 불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한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박문수가 다시 그동네 어귀에 이르러 보니 자기가 죽인 과부를 기리는 열녀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문수는 그 집에 들려 총각이었던 그 집 주인을 만나 물었다. 정말 죽은 형수가 열녀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러자 주인이 칼을 꺼내 들고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박문수는 결코 발설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이 얘기는 물론 야담에 지나지 않지만 시대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효자, 열녀 만들어내기 경쟁이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드러낼 꼬투리가 생기면 앞다투어 효자비, 열녀비를 세우고 정절사, 정려문을 동네 어귀에 지어 문벌을 빛내는 한 밑천으로 삼았다.문벌을 자랑하는 양반은 신분이 낮은 평민이나 천민을 가혹하게 대했다. 인사를 안했다고 잡아다 볼기를 친다든가, 술주정을 하였다고 술통에 쳐넣는다든가. 양반 말을 거역하였다고 북을 등에 지게하고 발에 줄을 달아 조리돌린다든가 하는 따위의 사형(私刑)이 자행되었다. 뿐만아니라 천민의 딸을 강제로 첩으로 삼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 갖은 구실을 붙여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물론 이러한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실제로 법 집행자가 이들의 행동을 묵인 내지 동조했다. 하층민은 늘 원한과 불만을 지니고 살았지만 신분의 벽을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반항을 시도했다가는 더 큰 제재가 가해지지 때문에 억울함을 가슴에 담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하층민은 야담이나 민속극, 가면극이나 인형극 따위를 통해 양반의 횡포를 고발하고 그들의 행태를 조롱했다. 야담 한토막을 읽어보자. 어느 소금장수가 평안도의 산골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에 개가죽 모자를 쓰고 몸에 개가죽 옷을 입은 양반이 자기 옆을 지나갔으나 소금장수는 못본체 하였다. 그냥 지나칠 듯하던 양반이 몸을 돌려 소금장수를 불러 세우고 불호령을 내렸다."너는 웬놈이기에 양반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느냐?" 그때 마침 개 한마리가 컹컹 짖으며 문밖으로 내달았다. 소금장수는 개를 향해 황급히 코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했다. 양반이 어리둥절해하며 소리쳤다. "아니 왜 개에게 절을 하느냐?" "저 양반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개가죽을 쓰셨는데 샌님댁 자제 도련님이 아닙니까?" 그 양반의 몰골이 어떠했을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었다. 평양감사 대부인 행상막에서 상두꾼이 병이 나 상여가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박첨지의 소개로 홍동지가 대신 상두꾼이 되었다. 홍동지는 난데없이 벌거벗은 알몸으로 나타났다. 관속이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짓이냐고 펄펄 뛰었지만 홍동지가 아니면 상여를 멜 사람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를 상두꾼으로 썼다. 홍동지는 벌거벗은 알몸인 채로 귀한 시체가 있는 상여를 보고 비아냥 댔다. "이게 암상여요. 숫상여요?" 그는 상여를 어깨로 못메고 엉덩이로 메겠다고 우겼다. 이윽고 상여를 메려던 홍동지는 시체의 썩은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주절거렸다."카아 아이구 냄새, 지아부 붙게 나네. 애당초 오뉴월 강아지는 외딴일세…" (최상수의 「한국의 민속극」 참고) 알몸으로 상여를 메고 상여를 함부로 다루고 조롱을 내뱉으면서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 따위는 양반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조롱과 모욕의 극치이다. 광대의 사설에도 이러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하층민은 이처럼 이야기를 통해 소극적으로나마 양반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고 반감을 분출시켰다. 박지원은 소설 「양반전」을 통해 하층민의 원한을 표출하였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