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추가
Update 9.25(금) 10:43
종합 정치/자치 사회/환경 농업/경제 교육/문화 기획/특집 전체기사
업데이트 뉴스

선비정신- 세도정치, 정조와 안동 김씨

'당쟁은 전쟁보다 해악' 탕평책 내건 정조 인사 실패
정조 사후 시작된 세도정치시대 조선왕조 국정의 공백기
김좌근은 순조 때 시작해 대원군에 종식된 세도정치 핵심인물
2020. 08.05(수) 13:49확대축소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1752~1800·재위 1777~1800)의 호남에 대한 애정을 엿 볼 수 있는 221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지난해 1월 31일 오후 광주 남구 광주향교 유림회관에서 공개됐다.
경기도 이천 백사면 내촌마을에는 고택(古宅)이 있다. 고택 이름은 '김좌근 고택'이다. 김좌근. 순조 때 시작해 대원군에 의해 종식된 세도정치 핵심인물이다.(일명 안동 김씨 세도가라 함) 정조 사후 시작한 세도정치시대는 조선왕조 국정의 공백기다. 바다에는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양 배인 이양선이 출몰하고 땅에는 민란이 폭발하던 때였다. 조선 정부는 그 국내외 위기에 둔감하고 무심했다. 외척에 의해 장악당한 조선 정부에 관심사는 모순 해결보다는 권력유지와 확장이다. 그 세도정치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핵심세도가는 김좌근이다. 김좌근은 김조순의 아들이다. 김조순은 순조 장인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이다. 사돈에게 아들과 나라를 맡긴 사람은 정조다. 시작은 탕평책을 버리고 정실인사를 택한 정조였다. 정조는 군사(君師·군 주요 스승)라 자칭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과 논리로 관료들을 설득하던 군주였다. 스스로를(만갈래 강과 밝은 달의 늙은 주인)이라 불렀다. 논리가 먹히지 않으면 고집으로 주장을 관철한 절대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 고집을 상징하는 물건은 담배였다. 정조는 애연가였다. 1796년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다. 제목은 '남령초책문'이었다. "유익한 식물로는 담배만한 풀이 없다. 내 심신 피로는 오로지 담배로 풀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금지하자고 한다. 너희는 다방면으로 지식을 꺼내 차나 술보다 나은 이 약초의 효용을 증명하라"(정조, '홍재전서' 52, 책문) 일찌감치 "기우제를 지낼 때도 금주는 할지언정 금연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왕이었다. 또 규장각 학자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르는데, 승지에게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여 시한을 정했다. 시를 지어 올리자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에 써냈구나"하고 점수를 세 곱절로 내렸다.(정약용, '다산문집' 1권 시(詩)) 정약용이 써서 1등을 한 시 제목은 '태평만세 네글자가 그 가운데 있다네(태평만세 자당중)'였다.
훗날 몸져누운 정조 침실로 신하들이 찾아갔다. 정조가 물었다. "그대들이 입실한 지 얼마나 됐는가" 의관 이수지가 답했다. "담배 한 대 피울 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1800년 6월26일 '정조실록') 이틀 뒤 정조가 죽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입안하고 해결하던 권력자가 죽었다. 정국이 요동쳤다.
재위 13년째 가을, 정조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병란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편당의 명목을 만들어 서로 주륙을 해왔다"(1789년 10월17일 '정조실록') 당쟁을 전쟁만큼이나 해악이라고 본 왕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 선왕 영조를 이어 탕평책으로 각 당을 두루 임용해온 왕이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완공이 임박한 수원 화성으로 행차했다. 국가산업인 농업은 생산성이 높아지고 학문은 나날이 수준이 높아져가던 때였다. 3월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과 왕실 친족을 불러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벌였다. 왕은 신하들 앞에서 1795년을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광천재일유지경년)'로 선포했다.
그리고 공무원 임용 기준을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등극 전부로 나는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친인척은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근(고위직에 있는 친인척)들 폐단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별히 경들을 불러 속마음을 보여주니,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라"(1795년 3월10일 '정조실록') 이름하여 '우현좌척' 원칙이다. 인재를 가까이 하고(우현) 내외척을 멀리한다(좌척)는 뜻이다. 공정한 인사를 약속한 왕에게 학연이나 혈연 없이 실력으로 무장한 규장각 관료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정조 암살 사건 연루자로 유배 중인 '정치달의 처(妻)'가 풀려났다는 뉴스가 조정에 전해졌다. '정치달의 처'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다. 화완옹주는 양자 정후겸이 정조 암살 기도 혐의로 처형된 뒤 같은 혐의로 파주에 유배 중이었다. 정조는 그런 대역죄인을 아무도 모르게 풀어주고 겉으로는 친척을 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 따지며 법대로 하라는 대사헌, 대사간에게 정조가 이리 말했다. "선왕께서 사랑을 듬뿍 쏟으셨던 사람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여러 해를 넘기며 관료들이 극구 반대했으나 정조는 귀를 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4년 뒤 화완옹주를 사면해버렸다. 천년에 한 번 있던 경사스러운 해에 정조가 내걸었던 국정지표 우현좌척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헌신짝이 돼 버렸다. 1792년 10월 정조의 친위 관료격인 규장각 출신 관리들이 '현대 청나라 문제'를 즐기다가 대거 적발됐다. 외교문서 작성관 남공철이 올린 문서에 정조가 혐오하는 '저질' 단어들이 인용된 것이다. 소
위 '문체반정'의 시작이다. 남공철은 직위해제됐다. 성균관 유생이던 이옥은 저질 단어를 혼용해 쓰다가 아예 과거급제 취소 및 응시자격 박탈에 강제징집까지 당하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정조는 5년 전인 1787년 잡소설을 읽던 예문관 관원 김조순과 이 상황을 떠올리며 이들에게도 반성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청나라 사신으로 막 압록강을 건너던 서장관 김조순이 서둘러 반성문을 써서 파발로 보냈다. 다음은 정조의 독후감이다. "옹졸한 남공철이나 경박하게 듣기 좋게만 꾸민 이상황, 뻣뻣해 알기 어려운 심상규는 모두 억지변명이지만 김조순은 문체가 바르고 우아해 밤 깊은 줄 모르고 읽었다. 마음놓고 먼 길을 잘 다녀오라 이르라"(1792년 11월8일 '정조실록') 김조순은 정조의 문체반정을 적극 지지하는 관료로 변신했다. 이후 정조 입맛에 쏙 든 김조순은 승승장구했다.
1785년 그가 과거에 붙었을 때 정조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이라 칭찬하며 본명 '낙순'을 '조순'으로 직접 개명시켜준 김조순이었다. 어디까지 승승장구했는가. 정조의 사돈이자 후임 왕 순조의 장인이 된 것이다. 재위 24년째인 1800년 2월26일 창경궁 행각인 집복헌에서 정조 세자 며느리를 고르는 첫번째 간택이 거행됐다. 행호근 김조순, 진사 서기
수, 유학 박종만과 신집,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간택에 들었다. 그날 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정조는 김조순에게 따로 편지를 보냈다. "상하 모두(그대 딸을 가리켜) 그런 처자는 처음보았다고들 하였다.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장인)로서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조순이 정조와의 만남을 기록한 '영춘옥음기'에는 한해 전 김조순이 정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친인척도 사대부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있지만 사대부를 친인척처럼 쓰면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없다"(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대동학문학 43집, 2015, 재인용) 1800년 6월 정조는 다시 만난 김조순에게 세자를 위해 세도(世道)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조순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께서 표방했던 우현좌척을 바꾸신다는 뜻인가' 그리되었다. 김조순을 만난 직후 정조는 급서했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동안' 의료진을 기다리게 할 정도로 잠에 빠져 있던 그날 이후 하루에도 수차례 수은 증기를 쐬는 독한 연훈방 처방까지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두달 전 이뤄진 재간택에서 정조는 김조순에게 "아비라도 함부로 딸 방에 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 간택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지막 간택은 2년 뒤 이뤄졌고, 그 딸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됐다. 1803년 어린 순조 뒤에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섭정을 거뒀다. 국구(국왕의 장인) 김조순은 정조 사후 권력을 장악했던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안동 김씨를 대거 등용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풍양 조씨로 이어져 이후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됐다.
김조순은 '사람이 조심스럽고 넉넉하고 후덕했으나, 외랍스럽게도 권세를 거머쥔 간신 흔적이 있었다'(황현, '오하기문') 그의 아들 김좌근은 소실인 나합과 권력과 금권을 휘두르며 왕실과 나라를 뒤흔들었다. 순조, 헌종, 철종 3대로 이어진 세도의 시대는 온 세상이 급변하던 때였다. 그 시대가 텅 비었다.
경기도 이천에는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아비 묘막으로 지은 고택이 남아 있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큰 집들은 연전에 후손들이 매각해 주춧돌만 남아있다. 입으로 능력 인사를 외치고 손으로는 정실 인사를 매진한 한 왕이 남긴 흔적이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사회/환경 주요기사
공적마스크 제조·유통업체 표창 ‘축산악취 해결’민-관 협의체 발족 나주시- 동대문구 변치 않는 우정 돋보여
전통시장 코로나19 방역소독 '철저'전남소방, ‘재난현장 회복지원차량’ 운영… 내영노인복지센터장 만허 스님
선비정신- 오로지 백성을 생각한 토정 이지…도로시설 피해 응급복구 민·관·군 동참 한전, 호우 피해 성금 10억 원 기탁
나주경찰서, 금천농협·금천면 이장단에 감…8월 개인지방소득세 납부의 달 운영한 사람의 일손이라도 보태야죠~
개별 주택가격 열람·의견 접수전남소방본부, ‘119이동상담센터’ 본격 가…‘전남사랑, 내 직장 주소갖기’ 캠페인
최신 포토뉴스

김수영 도예작가

<藝人> 조규춘 목수작가

<분양합니다!> 꿈꿔왔던…

나주시의회 박소준 의원

빛가람신문 만평

가장 많이 본 기사
회사소개 | 회원약관 | 개인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윤리강령 | 공지사항 | 제휴/광고문의 | 기자전용게시판

Copyright ⓒ bitgaramnews.com 인터넷신문 등록 : 광주 아 00237 | 등록일 : 2016.11.18 | 발행. 편집인 : 최왕식 | 부사장 : 김재옥 l 편집국장 : 박은정

(503-809) 광주광역시 남구 독립로 40 기사 제보 및 문의 : (062) 673-5255(代) 문의메일 : cws2344@hanmail.net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미경

(520-831) 전남 나주시 산포면 매성길 152-47 기사 제보 및 문의 : (061)337-4005

본사이트의 게재된 모든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 의 사전 허가없이는 기사와 사진의 무단 전재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