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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 정·순조때 李書九의 삶

14대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후손
"세금 징수보다 백성의 삶이 먼저이옵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기 들고 백성 편에 서
2020. 06.24(수) 13:52확대축소
8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역사문화특별전 '탑골에서 부는 바람'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제가 '북학의', 박지원 '열하일기' 등 북학 관련 자료와 함께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4명의 시를 뽑아 엮은 시집 '한객건연집', 유득공이 지은 18세기 한양의 세시풍속지 '경도잡지' 등이 소개됐다.
전설이 된 행정가 이서구를 찾아 강원도에 가면 춘천 초입 남면 백암리 산속에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주인 이름은 이서구(1754~1825)이고, 비석 글은 벗 남공철이 썼다. 그가 죽고 4년 뒤 당쟁이 일어 일생의 벗 남공철이 죽은 벗을 거칠게 비난하였다. 후손들은 유언을 어기고 세웠던 비석을 서둘러 묻어버렸다. 오래도록 세상은 소란하였다. 나라가 망했고 식민지가 되었다. 해방이 되었고 전쟁이 터졌다.
그가 죽고 150년 지난 1975년 박광철 이라는 마을 사람이 쇠꼬챙이로 땅을 찔러 무덤 앞 5m 땅에서 비석을 찾아냈다. 근 150년 만에 직립한 비석 머리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유명 조선 우의정 척재 이공 묘비명'. 전설이 된 행정가, 척재 이서구 이야기다.
실학 북학파의 아버지 연암 박지원에 따르면 이서구는 심령이 일찍 트이고 혜식이 구슬과 같았다. (박지원, '연암집' 7별집, '종북소선') 이서구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박지원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네사람의 보는 눈은 현실적이었고, 글들은 출중했다. 정조 눈에 들어 규장각에서도 함께 공부를 했다. 명·청을 흉내 내지 않고 독자적인 글을 쓴 이 네사람을 '한학사가(漢學四家)'라 부른다. 이 가운데 세사람은 '비루한' 서얼이었다.
이서구는 14대 국왕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후손이었다. 어엿한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벗들이 규장각에서 책에 파묻힌 사이, 이서구는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을 걸었다. 홍문관 교리와 한성부 판윤을 거쳐 수시로 지방 관찰사로 나갔다. 그런데 그가 거쳐 간 곳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성 뇌리에 박혀있는 이서구로 관료가 아니라 이인(異人)이었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 1820년 전라관찰사로 나갔을 때였다. 관찰사 이서구는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에 세상을 바꿀 비결이 들어있다고 들었다. 있긴 있는데, 여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다고 했다. 늙었으되 호기심 많은 이 관찰사는 즉시 전주를 떠나 선운사로 갔다. 백척 절벽에 부처님이 그려져 있고, 배꼽에 복장 흔적이 보였다. 사다리에 줄을 타고 올라가 복장을 열었더니 과연 그 속에 책 한권이 얌전하게 누워있지 않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겉장을 열었더니 첫 문장이 이렇게 적혀있었다.)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서구가 열어본다')
그 순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식겁한 이서구는 줄행랑을 놓았다. 세월이 흘러 1894년 동학 접주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 무리가 도솔암에 몰려들었다. 세상을 바꿀 비결이니 응당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고, 벼락은 이서구가 이미 맞았으니 겁낼 것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찌하여 복장을 열어 비결을 꺼내 갔다는 이야기.(이상 오지영, '동학사', 1973) 혹은 텅 비어 있었다거나 기껏 꺼냈더니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였다는 이야기.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이서구가 평안관찰사 시절에 들렀던 한 절에서 주지가 이서구에게 자물쇠 구멍만 뚫린 궤짝 하나를 내놓았다. 속에는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고 "100년 뒤 이를 열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유전에 있었다. 그런데 이서구가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돌리니 바로 뚜껑이 열리는 게 아닌가. 이서구가 속에 있던 종이를 가져다가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이유언, '임하필기'27, '춘명일사')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이서구만 알고있다. 전북 부안에 들른 관찰사가 백산을 보고 '저 산이 뭔 산이냐' 라고 물으니 하인이 백산(白山)이올소이다'라 답했다. '허허 앉으면 죽산(竹山)이고 서면 백산이로다.' 세월이 흘러 그 백산에서 동학농민군이 죽창을 깎아 훈련을 하는데, 앉으면 죽창만 올라서니 죽산이고 서면 흰옷만 보이니 백산이었다.
농민군은 노론 출신 관료에 의지해 개벽전설을 사실로 믿으려 했고, 그 신통한 관료가 예언한 바대로 개벽을 준비한다고 믿은 것이다.(남재철, '이서구 설화의 역사적 배경', 고전문학연구, 2004) 백성 스스로도 너무 비현실적인지, 이서구가 예지력을 소유하게 된 내력까지 전설로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서구가 완주 위봉사에 들렀다. 주지가 접대할 고기가 없으니까 마당에서 뱀 한마리를 잡아 대가리와 꼬리를 떼고 대접했다. 맛있게 먹은 관찰사가 "대가리를 내라"고 하자 주지가 '흑질백장'이라는 독사라고 이실직고했다. 주지를 용서해 주고 숨겨둔 대가리와 꼬리를 마저 먹은 이서구는 순식간에 신통력을 가지게 되었다.('한국구비문학대계') 관찰사 이서구가 점을 보니 나주 이방의 집에 역적이 태어날 팔자였다. 하인에게 시키기를, 태어난 아이가 남자면 죽이고 여자라면 내버려두라고 했다. 하인이 여자아이라 두고 왔다고 하니 이서구가 이리 답했다. '아이가 장차 커서 국권을 뒤흔들겠구나.' 과연 아이는 천하절색으로 자라나 기생질을 하다가 나주목사 김좌근의 첩이 되었다. 김좌근이 영의정으로 세도를 휘둘를 때 이 여자가 조정을 뒤흔들다가 쫓겨났다. 이 여자가 나합이다. 그러니까, 무법천지 세도정치를 일개 관찰사인 이서구가 예언했다는 전설이다. 나주 관아에는 영의정 김좌근 공덕비와 동학군을 평정한 금성토평비가 나란히 서 있다. 전설은 백성이 만든다. 마애불 복장 유물도, 요녀(妖女) 나합도 이서구가 남긴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조 사후 모순이 증폭돼 가는 조선왕국 백성들이, 그 모순을 예언한 예지자요 해결해줄 구원자로 관찰사 이서구를 택한 것이다. 탕평책과 문치(文治)로 나라는 화려하게 포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성은 신음했다. 가난으로 신음했다. 가난은 학정과 수탈에서 나왔다. 1787년 경상우도로 암행을 다녀온 어사 이서구가 이렇게 보고했다. '환곡은 생판으로 빼앗는 것과 같아서 환곡이 없다면 참으로 낙토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 참으로 불쌍하다.' 그래서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하고,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1787년 5월4일 '정조실록')
이서구는 환곡과 군정, 노비에 얽힌 문제를 조목조목 보고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내놓았다. 그런데 폭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55년 뒤인 헌종 8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조귀하에 의해 전 전주판관부터 군산 첨사까지 백성을 괴롭힌 전라우도지방관 26명이 떼로 적발됐을 정도였다. 그 험악하고 가난한 시대에 이서구는 부임하는 곳마다 행정의 기준을 백성으로 삼았다. 암행어사 때 경상도에서 목격했던 모든 모순을 현장에서 해결하려 한 것이다. 1793년 첫번째 전라관찰사 시절, 세금을 거두는 대신 창고를 풀어서 백성을 구휼했다. 정조는 '기필코(백성을) 소생시키라'고 그에게 힘을 주었다.(1793년 8월16일 '정조실록') 1820년 두번째 전라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최우선 임무는 양전(量田)이었다. 토지를 다시 측량해 세금을 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서구는 이렇게 보고했다. '양전은 백성 구휼을 위함이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빈궁한 백성이 아직 소생되지 않았는데 세금을 다시 매길 수 없다'(1820년 8월2일 '순조실록') 증세를 요구하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이서구는 반기를 들고, 백성 편에 선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본 순조가 이서구를 우의정에 발령내자 이서구가 우의정을 끝내 거부하여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공철, '이서구 묘비명') 정약용은 '평안도 관찰사 시절 선정으로 지금도 평양 주민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기록했다.(정약용, '목민심서'3 '애민6조) 이게 일개 관찰사가 전설로 전승되고 있는 연유다. 전북 정읍에는 피향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흩어져 있던 각종 선정비들이 모여 있다. 오른쪽에서 둘째는 위풍당당한 관찰사 이서구 성정비다. 맨 왼쪽은 현감 조규순 선정비다. 1893년 조규순 선정비를 세운 사람은 아들인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이다. 이 비석을 세우며 거둔 돈과 만석보 물세에 분노해 백성이 죽창을 든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공간에서 참으로 다르게 행정을 한 두사람 흔적이 함께 햇살을 받고 있다. 비석 사이 거리가 10m도 되지 않는데, 참으로 멀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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