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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人奇事- 최초의 직장여성-의녀와 여형사 다모

연산군은 의녀를 기생 역할까지 도맡게 했다
2020. 02.20(목) 10:24확대축소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묘 묘정에서 연산 숭모회 주관으로 개최된 연산군 청명제향.
고대엔 남녀유별(男女有別)이 혹심해, 올림픽 개회중에 경기장에의 여자접근은 법률로써 금지돼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봉건주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음식을 만들거나 바느질하는 일, 또는 술자리 시중을 드는 일과 같은 천한 일은 여성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는 일에 여성이 종사하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직업을 가진 여성'은 없었다. 다만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의사와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 일부 있었는데, 이는 그 직업의 특수한 필요에 따른 것으로 아주 드문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여자의사는 의녀라 불렀고, 여자형사는 다모라 불렀다. 그런데 이처럼 여자의사와 여자형사제도가 시행된 것은 여성의 권리가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던데 따른 결과였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의녀제도가 실시된 것은 조선초기부터였다. 남녀구별이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부인의 병을 남자의사가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궁중에서 이같은 여자의사의 수요가 컸다. 그리하여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18년(1418)에는 궁궐에 7명의 의녀를 두었다. 그 뒤에도 어린여자아이를 선발해 제생원에 맡겨 국가의 지원으로 의술을 익히게 했다.
전문인인 의녀의 역할을 망가뜨린 이는 폭군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시절 의녀는 기생의 역할까지 도맡게 된 것이다. 연산 10년(1504) 6월13일 「연산군일기」를 보자. '잔치 때 의녀 80명을 가려 뽑아 예의를 가르치고, 재주있는 기생은 옷을 깨끗이 입혀서 어전의 섬돌 위에 앉혀라.'
의녀가 기생처럼 술자리에 불려다닌 것은 궁중에서만이 아니었다. 사대부집의 잔치에도 의녀가 넘실거렸다. 선조 38년(1605) 4월10일의 「선조실록」에는 이를 규탄하는 혜민서 관리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의녀를 뽑은 것은 의술을 가르쳐 나라에서 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규율이 흐트러지고 사치 풍조가 널리 퍼져 마을의 크고 작은 술잔치에 의녀를 부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의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의술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의녀가 의사역할 이외에 기생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데도 규방을 수색하거나 염탐하는 따위 남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의녀에게 맡겼다. 의녀가 여형사 역할까지 한 것이다. 광해군 5년(1613) 6월13일의 「광해군일기」를 보자
'영의정 이덕형이 아뢰었다. "평상시에 사대부들 집에서 사람을 붙잡아 올 때는 이따금 의녀들에게 들어가 염탐해보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 관례에 따라 의녀에게 대비전의 궁녀를 찾아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승지에게 명령했다. "영의정의 말에 따라 수문장과 선전관을 많이 정해 다른 사람들은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한 뒤에 의녀가 들어가 찾아서 잡아오도록 하라."
특히 광해군은 의녀를 여자형사로 활용하는데 열심이었다. 이듬해 7월27일에도 광해군은 폐위된 임해군의 기생환어사가 민간 집으로 몸을 숨기자 의녀에게 "갖은 방법을 써서 수색해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의녀의 여자형사 역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사실 그 전부터 이러한 관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이다. 「중종실록」에는 중종 21년(1562) 2월15일 왕이 직접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록이 있다.'생각해보니 의녀를 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포도대장을 따라가 사대부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의녀를 둔 본래의 뜻과 다르다. 이것은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라 의논이 필요하니 담당 관리를 불러 의논하라.'
의녀 제도는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의녀가 기생이나 여자형사 노릇까지 떠맡는 사례는 거의 줄어들었다. 동시에 이때부터 다모라는 여자형사가 등장해 궁중은 물론 일반 민간인들의 형사사건에 투입되었다. 다모란, 형식적으로는 관청에서 식모 노릇을 하는 여자 노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다모는 의금부 형조 포도청에서 특수한 임무를 맡아왔다. 그리하여 다모를 뽑을 때는 키가 5척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사발을 단숨에 마실 수 있어야 하며, 쌀 다섯 말을 번쩍 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다모에게 맡겨진 일차 임무는 수색과 염탐이었다.
정조 14년(1799) 9월7일의 「정조실록」을 보자.
이날 왕은 내수사(궁중에서 쓰일 물품과 노비의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관원이 궁인을 가마에 태워 가는 것을 검문한다며 소동을 벌인 파주 목사 겸 적성 현감 홍삼덕을 질책하고 있다. '명령을 받은 행차를 어찌 감히 막는단 말인가. 그 현감을 잡아다 신문하고 엄중히 처리하라. 이미 명령을 맏든 관원에게 가마의 휘장을 활짝 걷어올리게 하고 그고을 다모를 불러다가 궁인의 모습을 확인하도록 했다. 정말로 죄인이라면 어찌 이같이 의혹을 풀어주는 일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감사의 보고가 너무도 형편없지 않는가. 이것은 책임이나 때우려는 꾀이며 남을 흉내내는 일일 뿐이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처럼 눈가림 하는 수단을 쓴단 말인가. 감사를 해임하도록 하자.'
또한 정조 17년(1793) 1월12일 왕은 무예를 한 사람들과 무예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사람 50명을 가려서 돌아가면서 명정전 남쪽 회랑에서 숙식하게 했다. 이를 장용이라 불렀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장용청을 설치했다. 이른바 경호실은 만든 것이다. 장용청에는 이들 장교급 무관 외에도 이들의 업무를 지원하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도 배치했다. 그런데 이들의 명단에 다모 2명도 떳떳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자 형사인 다모의 역할이 일반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산군이 상식을 뛰어넘고 윤리를 파괴하는 악행에 비해, 정조는 아주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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