奇人奇事- 영조도 당한 ‘드로킹’ 사건
‘나주 괘서사건’등 조선도 유언비어로 여론 왜곡 했다는데…
댓글 조작 사건으로 재판 중인 김경수 경남지사는 무죄일까?
| 2020. 02.04(화) 15: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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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역사에서는 조선 후기 소론계를 몰살 직전까지 끌고 갔던 이 사건을 ‘나주 괘서사건’이라고 부르게 된다.
조선의 르네상스로 알려진 영·정조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온한’ 움직임이 많았다.
이인좌의 난(1728), 남원 괘서사건(1733), 나주 괘서사건(1755), 홍삼범 역모사건(1733), 문인방 역모사건(1783), 고영계 역모사건(1787) 등 각종 반체제 사건들이 이어졌다. 시작점은 대개 유언비어였다. 지금처럼 온라인 댓글을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거짓 소문을 만들어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널리 쓰인 것은 익명으로 글을 쓴 뒤 시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붙여 방방곳곳에 퍼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런 것을 ‘괘서’라고 불렀다.
영조 31년 나주괘서의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유가 있다. 괘서엔 정치적으로 과격한 내용이 담겼는데, 주로 고위 관료나 임금이 타깃이었다. 특히 임금에 대한 내용은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괘서에 대해선 ‘4자 흉언’ ‘6자 흉언’ 이라는 식으로 대체됐다. 괘서가 발견되면 불태운 뒤 내용만 상부에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보면 나주괘서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尹惠)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역적 윤혜가 고문 중 사망했다. 영부사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영조실록」 31년 5월6일] 국왕인 영조가 직접 국문에 참여한데다 주변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로 냉정함을 잃고 격분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주괘서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따라가 보면 대략 유추는 가능할 것 같다.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臣)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고자 하였다.[「영조실록」31년 5월20일] 신치운이 언급한 ‘게장’이 괘서에 접근한 코드다.
영조의 배다른 형이자 선대왕이었던 경종은 와병 중에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복통과 설사를 일으키며 36세에 급사했다. 왕위는 자연스럽게 왕세제였던 연임군(영조)에게 돌아갔다. 한의학에서는 단백질이 풍부한 게장과 탄닌이 들어있는 생감은 상극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누군가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은 배후로 연임군(영조)을 지목했다. 물론 영조는 펄쩍 뛰었지만 왕위 정통성을 생채기를 입게 됐다. “갑신년(경종이 급사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라는 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괘서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영조가 직접 국문에 참여하고 조선의 모든 수사 역량이 총동원되어 4개월간 조사를 벌였음에도 수감 중이던 주요 용의자가 독살되는 사건이 벌이지기도 한다. 범인은 수사에 참여했던 포도청 관리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사본부에 파견된 경찰관이 체포된 용의자를 독살해 ‘진상은패’를 시도한 셈이니 조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영조를 지지하지 않던 소론계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수사가 종결되면서 대대적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소론의 주요인사 500명이 사형된 것은 물론 이들 집안의 가족들은 노비로 만들었다. 이미 사망한 소론 주요 리더들도 관직이 삭탈됐다. 뿐만 아니라 소론과 가깝다는 혐의를 받은 종친들까지 사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괘서의 파급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4월에 마침 문의 노곡에 갔었는데 보를 쌓던 역군들이 흩어져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거쳐 문의 무릉정에 갔었는데 이신이란 자의 집 앞산과 뒷산에 피란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았다”[「영조실록」24년 5월24일] 1748년(영조24년) 충청도 문의에서 발생한 괘서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왜인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문의 고을 백성들이 내달 15일에 의당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관리들이 나서도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근대사회에서 괘서의 위력은 지금의 댓글조작 못지않게 파급력이 컸다. 이런 이유로 역모세력은 괘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했다.
1728년 12월부터 1월까지 전주-남원-서울로 괘서가 연이어 붙었는데 학계에서는 일련의 시나리오에 의해 추진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전 여론작업 덕인지 이인좌 세력은 순식간에 경기 안성·죽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조정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괘서에 한층 힘을 실어준 것은 예언서였다. ‘이씨 왕조가 없어지고 정씨가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의 「남사고비」,「정감록」,「요람」등이 영·정조시대부터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또 역모세력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예언서의 공통분모는 이씨가 망하고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정씨의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또 정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바다의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해도기병설’도 거론됐다.
‘임자년 2월에 정가가 먼저 해도에서 기병하고, 유가와 김가가 이를 따라 일어난다고 하였다’[「정조실록」9년 3월1일] 또한 예언서를 이용한 세력들은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해소를 주장했다. 「정감록」의 원전으로 불리는 「감결」엔 “부자는 돈과 재물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 등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겼다. 혼란한 시대에 안전을 보전할 장소를 제시하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18세기 영·정조는 여론을 왜곡 선동하는 세력을 엄벌하려 애썼다. 이 같은 여론 왜곡이 질서의 근간을 흔들 것으로 염려했다. 그러면서도 배후까지 발본색원하지는 못한 적이 많았다. 우리는 이를 역사를 통해 안고 있다. 한데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드루킹을 보면, 조선 후기 예언서를 이용한 모의세력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당시 모의 세력이 성벽이나 시장에 붙이는 괘서로 여론을 조종했듯, 이들은 ‘현대판 괘서’ 댓글을 이용했다. 또한 세력화 과정에서 「격암유록」이라는 예언서를 이용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확립했다고 한다. 자신이 이끌던 ‘경제적공진화모임’ 회원들에게는 파주 ‘두루미타운’ 이라는 곳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했다는데 ‘십승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경제 민주화를 통해 재벌을 해체하고 부를 균등 분배할 것이라는 이상을 꿈꾸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드루킹 논란을 두고 여야의 공방도 최근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간 공방처럼 뜨거웠다. 이를 당시는 야권이 특검을 강력히 요구하자 여권은 ‘우리도 피해자’라면서도 ‘특검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는 새 여권핵심 실세인 김경수 의원(현 경남지사)측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드루킹 사건의 핵심은 여권 정치인의 연관 여부 못지않게 소수가 다수의 여론을 왜곡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뒤흔들었다는데 있다.
법원은 국민의 눈과 귀를 믿는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 고운석 주필의 다른 기사 보기
